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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역의 음식을 배우고 먹는 것은
곧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 가는 과정
단짠맵신 24가지 요리로 만끽하는 동남아시아의 매력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는 어떤 곳일까? 사업가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비즈니스 무대, 유학생에게는 견문을 넓힐 배움의 장, 관광객에게는 휴식과 힐링의 공간, 아직 가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언젠가 한번쯤 경험하고 싶은,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 재직 중인 현시내 교수에게 동남아는 새로운 고향이다. 현지에서 접한 다채로운 음식들이 저자에게 한국과는 또 다른 소속감과 그리움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동안 연구와 현지 조사를 위해 곳곳을 방문하고 오래 거주했지만 동남아를 매번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것도 음식과 그 음식을 만들어 낸 문화였다.
동남아시아는 역사, 민족, 언어, 문화, 풍습이 엄청나게 다양하다. 15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몰려든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부를 독점하고자 해외 시장 개척과 식민지 건설에 열중했다. 그 결과 20세기가 되기 전에 거의 전 지역이 서유럽과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식민지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인도와 중국의 문명이 교차하고 아랍 상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지역에 유럽 문화까지 더해지니 하나의 문명이나 구조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매혹적이지만 복잡하고 낯선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쉽고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저자는 그 나라의 음식을 배우고 먹는 것이 곧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각지의 고유 음식을 직접 요리하고 맛보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경험, 그리고 그 음식을 둘러싼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한 권의 책에 담았다.
한국과 동남아는 다방면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앞으로 교류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동남아는 6억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 시장이자 투자 파트너이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 중 하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동남아 출신 외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남아시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24가지 동남아 대표 음식에는 독특한 산지 재료와 각종 향신료가 빚어내는 맛만큼이나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오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등지의 독특한 요리에 담긴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인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동남아가 한층 더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베트남 쌀국수 ‘퍼’, 인도네시아의 볶음밥 ‘나씨고렝’, 태국의 커리 ‘껭 키아오 완’…
제국주의와 식민지 역사가 빚은 시대의 맛
음식은 역사의 거울이다. 요리의 기원과 변천사, 재료와 조리법, 맛과 특색을 살펴보면 그 요리가 탄생하고 퍼져 나간 지역 사람들의 역사와 일상의 애환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대항해 시대 이후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권을 노린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지만 곧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과제에 직면했고 내란, 쿠데타, 독재 등 여러 시행착오도 겪었다. 동남아의 대표 요리에는 때로 엄혹하고 때로 격렬했던 시대상의 향과 맛이 배어 있다.
베트남 쌀국수 ‘퍼’는 한국에서 가장 익숙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동남아 음식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다수의 남부 베트남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전쟁 난민이 되어 미국과 제3국으로 유입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퍼는 세계화되었다. 베트남 쌀국수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제국주의 통치와 냉전,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이라는 가볍지 않은 역사의 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요리로 인도네시아의 볶음밥 ‘나씨고렝’이 있다. 한국, 일본, 중국의 ‘김치 논쟁’처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간 ‘나씨고렝 종주국’ 논쟁이 불거졌다. 세 나라는 오랫동안 종교와 음식 등을 공유하는 말레이 문화권에 속한다. 그러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화로 강제 분할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서로 다른 정체성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주국 논쟁은 원래 하나였던 문화권이 분리되면서 생긴 필연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알게 되면 이러한 종주국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고 많은 요리가 각자의 사정에 맞게 발전 계승해 온 ‘모두의 음식’임을 알 수 있다.
태국의 ‘껭 키아오 완’은 암울함과는 거리가 먼, 희망을 품은 음식이다. 1932년 태국은 인민당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로 전환했다. 태국에서 초록색은 ‘새로움’을 의미한다. 태국 사람들은 약초와 초록색 고추,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재료 삼아 ‘그린 커리’를 만들었다. 덕분에 태국 사람들은 껭 키아오 완을 먹으며 달콤한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필리핀의 대표 디저트 ‘할루할로’는 우리나라의 빙수와 닮았다. 열대에 속하는 필리핀에 얼음 디저트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필리핀은 해양 국가로서 중국인, 말레이인, 아랍인, 일본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565년부터 1898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스페인의 ‘메리엔다(merienda)’라는 간식 문화와 미국의 냉동 기술을 더해 ‘몽고야’라는 빙수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이 현지화되면서 할루할로가 되었다. 이처럼 할루할로에는 ‘제국의 용광로’라 불리는 필리핀만의 독특한 역사가 담겨 있다.
필리핀의 볶음면 ‘빤싯’, 태국의 바질 볶음 ‘팟 끄라파오’, 미얀마의 생선 수프 ‘모힝가’…
다양성과 화합의 정신이 담긴 문화의 맛
음식은 문화의 용광로다. 한자 문명권으로 묶인 한국, 중국, 일본과 달리 동남아시아는 민족, 언어, 풍습 등이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1만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는 2억 7500만 명이 3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1300여 종족으로 나뉘어 살기 때문에 단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동남아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다양성과 화합이다. 그리고 이는 음식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하따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워낙 민족 구성이 다양하고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가 뚜렷해 통일된 하나의 민족 국가 가능성을 불투명하게 했다. 그래서 내세운 원칙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다. 그리고 데치거나 살짝 찐 여러 종류의 채소를 땅콩 소스에 버무려 먹는 샐러드 ‘가도가도’는 이러한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요리다. 이 요리의 이름 자체가 ‘혼합물 혹은 뒤죽박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볶음면 ‘빤싯’은 ‘조화’를 상징한다. 빤싯은 쌀국수, 달걀면, 녹두면, 메밀면으로 만든 국수를 고기, 해산물 및 채소와 함께 볶은 요리를 통칭한다. 7640개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 빤싯의 대중화는 곧 다양화를 의미한다. 필리핀, 특히 루손 지역은 약 7세기부터 중국과 유럽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동서양 문화 교류의 거점 지역이었다. 덕분에 “필리핀 음식은 말레이 정착민이 주재료를 준비하고, 중국인이 양념하고, 스페인 사람이 조리한 뒤, 미국인이 햄버거로 만들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필리핀의 음식 문화는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한 필리핀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태국의 바질 볶음 ‘팟 끄라파오’는 홀리 바질(끄라파오)를 고기와 볶아서 밥에 올려 먹는 일종의 덮밥 요리다. 힌두교에서는 예로부터 홀리 바질을 키워 집 안을 가꾸거나 종교 의식에 이용했다. 크메르 제국이 오늘날 태국의 동북부를 지배하던 1000년 전에도 힌두교는 동남아시아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인도인들의 태국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힌두교 문화와 태국의 불교 문화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는데, 팟 끄라파오는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다양성과 화합을 상징하는 동남아의 음식들과는 반대로, 생선 수프 ‘모힝가’는 군부 독재와 고립이라는 미얀마의 안타까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확인해 주는 요리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답게 역사가 길고 문화유산도 많지만 잔혹하고도 끈질긴 군부 독재 때문에 미얀마 문화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는 잘 들을 수 없다. 특히 2021년 2월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모힝가는 미얀마의 국민 음식이지만 나라 밖에서는 맛보기 어렵다. 미얀마의 현실처럼 점점 낯선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태국의 샐러드 ‘쏨땀’, 인도네시아의 볶음면 ‘미고렝’, 필리핀의 조림 요리 ‘아도보’…
혼자여도, 함께여도 행복한 추억의 맛
음식은 기억 창고다. 어느 지역이나 시기를 추억하는 가장 행복한 방법 중 하나는 당시에 먹었던 요리를 떠올리는 것이다. 저자는 타지 생활을 하면서 동남아시아 친구들과 종종 만들어 먹었던 가정식, 현지 조사를 할 때나 출장을 갈 때면 반드시 찾았던 음식점 등 즐거움과 정겨움으로 가득했던 미식 경험을 소개한다.
파파야 샐러드 ‘쏨땀’의 고향은 태국의 동북부 지역 ‘이싼’이다. 급격한 산업화로 농사지을 땅을 잃은 가난한 농부들과 대도시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이 이싼을 떠나 방콕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고향 음식인 쏨땀을 먹으면서 고단한 하루를 버티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저자에게도 파파야 샐러드는 동남아시아라는 두 번째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다. 태국에 도착해 공항이나 호텔 근처에서 파파야 샐러드 한 접시를 먹고 나서야 ‘아! 내가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파파야 샐러드의 단맛, 짠맛, 신맛 그리고 매콤한 맛이 삶의 파워 스위치를 제대로 눌러 준다고 고백한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지역의 면 요리인 ‘락사’는 저자에게 있어 일종의 ‘입국 신고서’다. 락사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이 된 것은 중국인 이주민이 동남아시아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중국 이주민들이 현지인과 가정을 꾸리면서 락사가 퍼졌고 다양한 현지화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싱가포르에 갈 때면 창이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통에 들러 카통 락사 한 그릇을 먹는 것으로 또 다른 입국 신고를 마친다. 락사를 먹으면서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곱씹는다고 한다.
혼자만의 단출한 즐거움을 넘어 지인들과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도 소개한다. 저자는 유학 시절에 친구들과 모임을 할 때면 각자 먹을 음식과 음료수를 가져오는 포틀럭(potluck) 파티를 주로 했다. 포틀럭 파티의 단골 메뉴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의 볶음면 ‘미고렝’이었다. 인스턴트라면 브랜드인 ‘인도미’가 1982년에 처음 선보인 미고렝 라면은 현지에서 지금까지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제품이다. 그런데 인도미의 인기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겨우 최저 임금 수준을 받는 수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시간, 돈, 에너지 모두를 절약해야 했던 유학 시절 저자는 인도미 미고렝 한 봉지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포틀럭 메뉴는 필리핀의 조림 요리 ‘아도보’다. 필리핀 사람들은 신맛을 즐기는데 열대 기후의 더위를 이겨 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저명한 음식 작가인 도린 페르난데스는 필리핀 사람들이 “입술이 오므라들고 눈이 찡그려질” 정도의 신맛을 즐긴다고 평했다. 아도보는 우리나라의 고기 장조림과 비슷하지만 장조림과 달리 신맛이 강해 처음 접하는 사람은 당황할 수 있다. 아도보를 처음 맛본 저자도 그랬다. 하지만 이내 “아도보 국물을 흰쌀밥에 비비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낯선 맛의 매력을 깨닫고 나면 그 풍미는 더 강렬하게 각인된다. 중요한 건 마음을 열고 기꺼이 맛을 보는 것이다. 피시 소스(액젓)를 넣기 전과 후의 요리 맛이 다르듯,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던 동남아시아가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알고 싶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세계가 한 군데 더 생겨날 것이다.